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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고은이 피워낸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의 아름다움 - 스포츠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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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作 ‘행복한 풍경’ 72.0X53.0, 장지 분채- 작가 제공

고은 作 ‘행복한 풍경’ 72.0X53.0, 장지 분채- 작가 제공

‘고은 한국화전’이 제주국제컨벤션센터 갤러리 ICC JEJU에서 8월13일까지 열린다. 11번째 개인전을 여는 작가 고은은 제주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면서 소소함 속의 행복을 한껏 느끼게 만들어내고 있다. 필자는 장맛비가 기승을 부리는 8월의 첫날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내려놓음의 미학

“전시회 주제는 ‘제주의 풍경’이에요. 2010년 즈음부터 그렸던, 행복했던 유년의 기억들을 담아낸 ‘행복한 풍경’에다 최근 제주 주변의 섬들이며, 곶자왈, 일출봉 등을 담아낸 ‘바다주기 풍경’을 아우르는 전시회예요. 내가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을 담은 슬레이트집에서 이제는 강아지도 그리고 꽃과 풀들도 담은 제주의 풍경까지, 제 작품 활동이 한 자리에 모인 전시회라고 하면 될까요?”

‘제주의 풍경’이라고 했다. 그런데 일반적인 한국화의 풍경과는 완연히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 거대하고 장대한 산수, 또는 유유자적하는 선비가 거니는 자연도 아니다. 그렇다고 불가의 공사상이나 도가의 도를 이해하는 사상적 면모를 담아내는, 무욕의 풍경도 아니다. 실재하는 경관을 사생(寫生)하는 정선의 화풍과 같은 진경산수도 아니다. 화가 고은이 담아내는 ‘풍경’은 자아의 내면의식이 만들어낸 ‘내려놓음’의 역사를 담아낸 것이다. 그림을 하는 자가 그림에 대한 집착이나 이성적 분별력을 내려놓고 또 내려놓는 과정이 만들어낸 결정체들이다. 그는 말한다.

“제가 대학4년, 그리고 미술대학원을 졸업하고, 그리고 3년이 흘러갔어요. 그런데 그때까지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어요. 그림을 너무 사랑해서, 정말 좋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중압감이 저를 옭죄고, 인정도 받지 못하고, 그래서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하나 하고 고민에 빠졌어요. 그러다 문득 생각했죠. 그래 지금까지 그림만 보고 살아왔는데, 지금 내가 행복했던 시절,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제주의 슬레이트집을 그려보고 끝내자 했던 것이, 그때부터 시작되었어요, 지금의 작품들이.”

그림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만들었고, 그 그림이 끝나는 자리, 곧 내려놓음의 순간에 제주의 슬레이트집이 다가섰다고 한다. 2010년에 슬레이트집 한 채를 그려넣고 전시회에 출품했는데, 평론가 한 분이 화가에게 말했다고 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라고. 그것은 자신이 그림 그리기를 지금까지 지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필자는 그 말을 들으며 백창우의 시를 떠올렸다.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 그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렴 /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 테니//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지/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지 / 걸어가렴, 어느 날 그대 마음에 난 길 위로 / 그대 꿈꾸던 세상의 음악이 울릴 테니.”(‘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신어림, 1996.)

미술학과라는 학제가 만들어낸 가르침은 끊임없이 이성적 통제, 분별력에 의해 작품을 구조화하라고 가르친다. 필자가 알고 있는 화가 고은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미술실에서 살다시피 한 인간이다. 그리고 대학, 대학원까지 이어진 그림에 대한 집착은 십 년이 되어 캄캄한 어둠과 맞닥뜨리게 했던 모양이다. 그것은 온전히 학제가 낳은 분별력의 병폐였을 수 있다. 그리고 절망의 수렁 속에서 ‘그래 마지막 한 작품, 내가 사랑하고 행복했던 시절의 공간 제주의 슬레이트집이나 한번 그려보자’라고 한 것이 그를 되살려냈던 것이다. 서양에서 이성을 통해 신성과 통하려 한다는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이성을 내려놓음으로써 궁극적 세계에 도달하려 한다. 어쩌면 그 이치와 맥락을 같이하는 화가 고은의 경험이 그의 그림세계를 형성해갔던 것이다.

2010년부터 이중섭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레지던스 프로그램(residence program)은 그를 본격적인 제주 화가로 발돋움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물론 그때도 그림을 잘 그리고,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리는 동료화가들이나 유명 화가가 돈도 안 되는 슬레이트집을 그린다며 비웃으고, 그만 접으라고 하여 많은 상처를 받기도 했단다. 그런데도 그는 집념을 갖고 버텨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업들을 지속해 갔다고 한다. 어느 순간 슬레이트집 옆에는 풀과 꽃, 나무가 생겨나고, 생동하는 제주의 모습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딱 10년이 지나는 시간 동안에 화가는 따뜻한 제주의 서정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작가로, 제주의 의미와 가치를 노래하는 제주 작가로 살아냈던 것이다.

■선을 치는 수묵 담채의 세계

그가 보여주는 한국화의 기법은 독특한 면이 있다. 어쩌면 동화와도 같고 일러스트 같기도 하고, 판화 같기도 한 그의 한국화 기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물었다.

“선을 친다는 말 아시죠? 선을 긋는다는 것과는 다른 거예요. 단순히 선을 긋는 게 아니라 기운생동의 힘을 가진 필력으로 굵고 가느다란 선을 치는 거지요. 굴곡이 있고, 집도 비틀어져 있고, 기와도 외형이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선을 칩니다. 그리고 이 작업이 끝나면 수묵담채의 기법을 끌어들여 제주의 자연과 가까운 따뜻한 색을 입히는 거예요.”

‘선을 친다’는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 음악의 연주법에서 가장 두드러진 ‘농현(弄絃)’과 같은 것일 게다. 서양의 음악에서는 여러 악기가 한순간에 소리를 내며 어울림의 미학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음악에서 가야금 같은 악기는 독주곡으로 줄을 짚고 흔들어대는 여러 ‘꾸밈음’을 창조해낸다. ‘떠는 주법’이 바로 농현 기법이라 할 것이다. 고은의 그림도 마찬가지여서 슬레이트집의 직선이 됨직한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굵고 가늚의 떨림이 살아 있음을 보게 된다. 그가 말하는 ‘선을 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세계를 가리킨다.

정말 아름다운 선이 나오려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다. 사군자의 난을 칠 때의 필력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생각해 보면, 화가 고은의 한국화가 지닌 미덕을 제대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화가 고은의 원작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느끼는 감흥은 더욱 진하다. 거기에 전통 채색이 아닌 현대적인 채색을 입혔다. 그리고 그런 작업이 있기 전 하얀 장지에 제주의 고유한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거기에 그림을 그려내는 오랜 과정을 통해 깊고 따뜻한 서정을 고스란히 형상화해내는 작업이 수행된다. 이런 수묵담채화 기법은 고은 화가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현해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의 아름다움, 제주10경까지 이어지기를

“저는 머리도 나쁘고 고집도 있어선지, 내가 좋아하는 거에 빠지면 남들 의식을 잘 못해요. 슬레이트집만 보면 그리고 싶어져 마음이 설레었어요. 그리는 것이 좋았지만 나 자신과 계속 싸워야 했어요. 어떤 분은 ‘너 그림 그려 봐야 성공 못해. 돈 벌어야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돈 벌자고 그리는 게 아닌데. 내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아가기를 희망했을 뿐이었어요. 그러다 2015년도부터 사람들이 좋아해 주더라고요. 미술계가 아니라 일반인들이. 오늘 자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제 그림을 보니까 치유가 되더라고 하면서요. 마음이 다쳤던 나의 마음이 온전히 사람들에게도 전달되는 때가 오더라고요. 2015년도엔 설문대여성센터에서 여성작가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가로서의 길을 인정받은 기분이었고, 이후에 개인 작업실까지 지을 수 있었어요.”

E. H. 곰브리치(Gombrich)는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에서 미술이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그리는 행위라고 했다. 화가는 자신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상을 그려내는데, 그것은 현재 자신이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그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술은 화가의 정신세계에 존재하는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환상(fantasy)’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화가 고은이 그려내는 판타지는 작고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들에 담겼다. ‘곶자왈’이라는 제주의 숲, 바다 위의 섬들, 사라져가는 시골의 슬레이트집들, 그리고 돌담들. 제주의 흙과 물, 바위, 풀과 꽃, 나무들 하나하나가 가치와 의미를 지닌 작가의 판타지다. 그리고 그것은 유년부터 지니고 있는 작가의 마음속 따뜻한 심성이요 행복이다. 화폭에 담긴 그 심성과 행복은 상처 많은 관람객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에 대한 눈여김은 점차 제주도라는 세계를 아우르는 세계로 미적 세계의 확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화가는 작고 보잘것없어 무심하게 지나쳤던 풍경들을 새롭게 구성하면서 제주의 가치를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그는 말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제주가 온갖 난개발에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이 괴롭다고. 온전하게 소박한 이 풍경들이 살아있는 제주를 지켜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그가 그리는 세계는 우리가 지켜야 할 제주의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니할 수 없다. 화가는 우리가 지켜내야 할 제주의 아름다움을 담은 ‘고은의 제주10경’이라는 작품전 기획도 내어놓았다. 아마도 2021년에는 화가 고은이 꼽는 현대 제주의 10경을 관람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듯하다.

■프로필

고은(Ko-eun) 화가는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성신여자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11회의 개인전과 제68주년 4.3초대전, 여성작가 9인 초대전 등 다양한 초대전 및 단체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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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07, 2020 at 06:25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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